커피와 윌리엄 브레이크

 코스트코에서 대용량으로 산 드립백이 맛없었던 한참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었는데. 재작년 말 이사 오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어떻게 커피를 마실지 고민했다. 집에서 커피를 즐기는 사람은 나 하나지만 하루에 두 잔 이상은 웬만하면 마시지 않는다. 소비량이 적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카페 아르바이트 당시 주무기였던 에어로프레스는 △생각보다 고가였고 △드립커피는 진입장벽이 높아 △커피머신을 사려면 까다롭고 △캡슐커피머신을 사려면 네스프레소 캡슐은 쓰레기 처리 문제가 있다며 △이리는 호환되는 캡슐이 적다고 주장했다. 드립백은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근데 맛이 없었어. 또 고민이 시작됐다.

아르바이트하는 스케이프 앤 스쿱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손을 씻고 캡슐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만들면서 생각난 말을 그대로 뱉어냈다. 집에 사둔 드립백이 너무 맛이 없어서 고민이에요. 커피 머신이나 드립 커피 도구를 사야 해요. 그러자 사장님께서 안 쓰는 커피포트가 있으니 가져가서 쓰라며 꺼내셨다. 이런 마음을 이렇게 쉽게 받아도 되겠어요? 드리퍼는 도자기로 구매하라는 조언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드립 커피 도구를 꼼꼼히 살펴본 뒤 즉석에서 결제했다.

드립 커피세트가 마련되자 커피에 주어진 짠 예산은 어느새 잊혀졌고 원두커피를 고르는 재미가 따라왔다. 첫 번째 원두는 단골 카페에서 샀지만 볶은 지 오래돼서인지 시큼한 건지 알 수 없는 원두였다. 유자 맛이 났어 두 번째 콩은 마켓컬리에서 골랐다. 흔히 볼 수 있는 돌멩이 모양의 엔트라사이트 원두였다. 설명을 보고 마음에 드는 맛을 골라보니 원두 이름이 무려 윌리엄 브레이크였다. 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무렵 읽던 책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이름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희생양에게서 빌린 책 숲에서 우주를 보다 첫 장에 윌리엄 블레이크의 문장이 나온다.

한 알의 땅에서 세상을 본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자.

이 글에는 숲의 작은 생명체에서 우주를 탐구하는 저자의 시선이 담겨 있다. 이 시선을 따라 나만의 숲을 상상했다.

그리고 당시 간간이 읽던 올가의 죽은 자의 뼈 위에 쟁기를 만들어라는 매챕터가 브레이크의 시로 시작된다. 등장인물인 야니나 두셰이코와 디지오는 브레이크의 시를 번역한다. 책 제목도 브레이크의 글이다. 죽은 자의 뼈 위에 쟁기를 그어라 작품 해설에서는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작품을 남긴 시인이자 급진적인 사상가로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개탄했던 아나키스트였다. 또한당대의정치사회문화와관련된여러가지사안에대해독특한예언자적전망을제시하면서이를예술의영역에서독자적인상징체계를통해재창조해낸예언자이기도하였다. (…)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하면서 자연에 대한 통합적 사고와 전체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생태주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기에 인간을 자연 생태계의 일부로 보고 생명의 존엄을 강조해 온 토카르추크가 브레이크의 시를 작품의 모토로 설정한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두 권의 책을 떠올리게 한 앤틀러 사이트의 전두는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정신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내면입니다.모든 대상을 자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상상을 넘어 우리에게 존재하는 내면의 거주자와 재회합니다.

책에서 브레이크는 자연 생태계 속에 있었지만 콩은 브레이크를 빌려 대상을 자각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블레이크의 예언과 같은 시에서 정신을 깨우는 것이 커피가 감각을 열어주는 것과 같아 흥미롭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언트라사이트 패키지와도 어울린다.

근데 역시 생태 아티스트가 더 끌리는 인간 내면의 거주자가 자연 생태계 안에 있다는 걸 엄중한 언어로 얘기하는 브레이크가 좋아 앤틀러 사이트의 원두커피가 브레이크의 말로 생태계 속에서도 원두커피와 인간을 연결시켰더라면 더 와닿았을 텐데. 스케이프&스쿱으로 자연을 마주보며 생태계에 위치한 자신을 발견하고, 두 권의 책을 통해 내면의 생태계에 브레이크가 정착된 덕분에 이 원두에 빠져 맛있는 커피를 마신 것이 이미 만족스럽다고는 하지만…이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만든다. 냄새 좋아